어찌보면 정갈한 아침을 먹는다.
이런 아침 말고 진짜 정갈한 한국식 밥상을 먹고 싶은데 그러려면 아직 멀었다.
숙소 앞에 있는 가게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있었다.
광고판을 보니 40년 동안 팔고 있는 곳이라 써 있길래 잔뜩 기대하며 줄을 섰다.
40년 전통이라길래 수제 아이스크림을 파는 줄 알았는데 공장에서 가져온 큰 벽돌 아이스크림을 잘라서 파는 것이었는데 맛은 있었다.
오랜만에 벽돌 아이스크림을 보니 인도에서 먹은 벽돌아이스크림이 생각난다.
발렌시아에서 여유롭게 일정을 잡았더니 오늘도 딱히 할 일이 없어 그저 동네 구경을 나섰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어 구경을 갔는데 아이들을 대상으로 연극을 하고 있는데 어른들이 더 많이 보고 있었다.
짧은 스페인어 실력과 눈치, 코치를 이용해 잠시 구경을 하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일요일이라 중앙시장이 문을 닫고 그 주위에 장이 열렸다.
마지막 남은 본드를 바르셀로나에서 샌들이 끊어졌을 때 써버려 마트에 갔었는데 하나에 3유로(한화 4,200원) 정도 해 그냥 나왔었다.
우선 혹시 모르니 비상용으로 하나만 사려고 했는데 4개에 1유로(한화 1,400원)이라고 한다.
유럽에서 이렇게 본드를 싸게 살 수 있다니 메이드 인 차이나의 위력은 대단하다.
하지만 아무리 중국제가 싸다고 해도 본드 하나에 100원이었던 메이드 인 인디아는 따라오지 못한다.
앞으로 파스타를 비롯한 밀가루 음식을 물리도록 먹을테니 쌀을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두기로 하고 빠에야를 점심메뉴로 골랐다.
병에 든 것은 참기름이 아니라 와인인데 빠에야를 파는 곳에서 직접 담근 와인도 팔고 있길래 주저하지 않고 한 병을 샀다.
와인은 5유로(한화 7,000원) 정도 했는데 술에 들어가는 돈은 전혀 아깝지 않다.
가족끼리 공원으로 산책 나온 모습이 많이 보였는데 대낮부터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민망했다.
한번은 여자아이가 아빠와 자전거를 타고 가다 넘어졌는데 아빠가 다가가서 일으켜 주지 않고 멀리 떨어져서 괜찮으니 털고 일어나라며 말을 한다.
아이가 넘어졌을 때, 손을 잡아 주는 것도 좋지만 스스로 일어나는 법을 알려주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그래도 내가 넘어졌을 때, 혼자가 아니니 힘을 내라고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너무 많이 다니길래 자리를 옮겼다.
내가 지금 유럽에 있고 소주가 아닌 와인을 마시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이 본다고 생각하니 민망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노래를 듣다보니 금세 와인 한 병을 다 마셨다.
숙소로 돌아와 여행기를 쓴다.
현재 여행하고 있는 시점과 여행기의 시점이 차이가 꽤 나는데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여행이 먼저이고 여행기는 다음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기로 했다.
괜히 시점을 맞춘다고 여행기의 질과 양을 낮추고 싶지는 않으니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매주 한 편씩 끊기지 않고 올리는데 의미를 두기로 했다.
여행기를 쓰며 빈둥거리다보니 기차를 탈 시간이 돼 기차역으로 향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유럽이고 야경도 아름다우니 기차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기차를 기다리는데 '꽃보다 할배'에 나왔던 식당칸이 보인다.
나도 저기서 미친듯이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재정상태를 생각해 참고 내 자리로 간다.
다음 목적지인 그라나다까지는 10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이기에 비싼 침대칸이 아닌 저렴한 좌석표를 끊었다.
자리에 앉아 잠을 자려하는데 옆자리에 앉은 히피 형이 신발을 벗는데 발냄새가 장난이 아니었다.
거기에 술까지 마셔 입냄새도 너무 심했다.
겨우겨우 잠을 자다가도 숨을 쉬기 위해 1시간 간격으로 잠에서 깼다.
잠들만하면 냄새때문에 숨이 막혀 자다깨다를 반복하다보니 그라나다에 도착했다.
냄새때문에 질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는데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미리 예약해뒀던 호스텔에 가니 얼리 체크인이 가능하다고 한다.
짐을 내려놓으니 아침도 먹어도 된다고 해 맛있게 먹었다.
히피 형아때문에 잠을 설쳐 눈을 좀 붙이려 했는데 잠이 안와 그냥 밖으로 나왔다.
솔직히 바르셀로나는 내가 생각하던 스페인이 아니었는데 발렌시아부터는 정말 스페인스럽다.
책이나 영화에서 묘사하던 스페인의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지니 즐겁다.
혼자 거리를 둘러보려다 프리 워킹 투어에 참가했다.
웬만한 여행지에는 프리 워킹 투어가 존재하는데 2~3시간 정도 걸으면서 도시에 대해 영어로 설명을 해준다.
아무리 공짜라고 하지만 마지막에 적절한 팁을 주는 것이 예의다.
이 곳은 유대인 상인들이 살던 숙소라고 한다.
유대인 상인하면 베니스의 상인이 떠오르는데 과연 내가 이탈리아의 베니스를 가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 거리는 과거 그라나다 지방이 이슬람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비단 시장이 있던 알카이세리아 골목이다.
적들이 침투했을 때를 대비해 좁은 골목으로 만들었지만 화재가 일어났을 때, 초기 진화가 어려워 많은 비단이 불에 타버렸었다고 한다.
날씨가 화창하니 정말 기분이 좋다.
스페인을 여행하기 가장 좋은 때는 4~5월이라고들 하던데 5월의 스페인은 정말 아름답다.
다음에 들른 곳은 비브 람블라 광장이다.
이 곳에는 유명한 츄러스 가게가 있는데 초콜릿에 찍어 먹는 츄러스가 맛있다고 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겨울에만 먹는데 관광객들은 여름에도 와서 먹고 간다면서 웃으며 설명해줬다.
날도 더운데 맥주가 아닌 츄러스를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그냥 지나쳤다.
사실 한적하게만 보이는 이 광장에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있다.
그라나다에서 벌어진 이슬람과 기독교의 전쟁이 기독교의 승리로 끝나자 이 광장에서 100만 점이 넘는 아랍 문화재들과 책들이 불태워졌다.
기원전 221년에는 진나라에서 분서갱유가 일어난 뒤로 스페인의 기독교도 책을 태웠고, 히틀러의 나치와 캄보디아의 폴포트도 책을 불태웠다.
고대부터 사람들의 사상을 통제하고 진실을 숨기기 위해 책을 불태워 왔고 많은 사람들이 그 책들을 지키려다 죽어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책을 멀리하고 있고 2013년 대한민국 성인의 1년 평균 독서량은 9.2권이고 해마다 줄어 들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분서갱유가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책이 없어진 시대가 올까 두렵다.
이 성당은 그라나다 대성당인데 1523년부터 180년에 걸쳐 지어졌다고 한다.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부터 느낀 것이지만 100년이 넘는 대공사를 해온 모습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성당의 벽에는 이상한 낙서들이 남아 있다.
이 것은 낙서가 아니라 과거의 대학생들이 졸업을 하면서 황소의 피로 글을 쓰던 전통인데 벽돌 사이에 스며든 황소의 피는 지워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라나다 대성당 옆에는 이사벨 여왕과 남편 페르난도 왕의 무덤이 있는 왕실 예배당이 있다.
이사벨 여왕은 그라나다를 정복하면서 스페인을 통일한 여왕인데 그라나다를 정복하기 전, 자신은 그라나다를 정복할 때까지 씻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사벨 여왕이 요새화된 그라나다를 정복하기까지 11년이 걸렸다는 것인데 남편인 페르난도 왕이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계속해서 설명을 들으며 길을 걷는데 가로등이 참 예뻤다.
여행을 하며 많은 것들을 보고 생각하는데 나중에 내가 살 집의 인테리어에 대해서도 여러 생각을 해보고 있다.
하지만 집 값이 너무 비싸 과연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유럽이라 그런지 성당과 교회가 많다.
이 곳은 그레고리오 교회인데 예전에는 감옥으로 쓰이다가 홍등가로도 쓰였었다고 한다.
운이 좋아 예배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쇠창살로 가로막혀져 있었다.
이 집은 스페인 최고의 플라멩코 가수로 알려진 엔리께 모렌떼의 집이라고 한다.
엔리께 모렌떼는 2010년 사망했지만 그의 딸인 에스떼야 모렌떼도 유명한 플라멩코 가수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플라멩코는 스페인 남부 지방에서 발달한 음악이지만 유명한 가수들은 마드리드에 있으니 마드리드에서 보라고 조언을 해준다.
멀리 언덕 위로 그라나다를 대표하는 알람브라 궁전이 보인다.
오늘은 그라나다 시내를 구경하고 내일 보러 갈테니 꼼짝말고 거기서 기다리렴.
스페인 남부 지역의 하늘은 마음에 드는 것을 넘어 사랑스럽다.
다음에 간 거리 이름은 까예 베소인데 한국어로 번역하면 키스의 거리이다.
이 거리에는 아름다운 딸이 있는 한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딸의 결혼식날, 딸이 나오지 않아 방에 들어가보니 딸의 숨이 멈춰있었다고 한다.
그 다음은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신랑이 나타나 키스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가이드가 웃으며 우리가 하고 있는 엉큼한 생각은 틀렸다고 한다.
신랑의 키스가 없이 결혼식은 장례식으로 바뀌었고 딸을 묻기 전에 엄마가 마지막 인사를 하며 딸의 이마에 키스를 하자 딸이 눈을 떴다고 한다.
가족간의 사랑이야기를 남녀상열지사로 풀이하려했던 나 자신을 되돌아 보게 만드는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키스의 거리를 끝으로 이제 워킹 투어가 끝이 나고 다시 혼자만의 시간이 시작됐다.
혼자 거리를 걸었다면 전혀 알지 못했을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었으니 고마움의 표시로 약간의 팁 5유로(한화 7,000원)을 냈다.
아무리 철판을 깔았어도 동전을 줄 수는 없으니 유로화에서 가장 액수가 작은 지폐인 5유로 짜리를 냈다.
그라나다에 오기 전에 인터넷을 보니 알람브라 궁전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미리 입장권을 예매해야 한다고 한다.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니 이미 1주일 후 까지 모든 표가 매진이라 새벽부터 현장에서 줄을 설 생각을 하고 그라나다로 왔는데 특별 예매기가 시내에 있다고 한다.
이 기계를 이용하면 여행사 같은 곳에서 반품한 표를 구입할 수 있다길래 찾아가봤는데 다행히 내일 오전 입장권을 구할 수 있었다.
내일 새벽 6시부터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행복해진다.
이 동상은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가 계약하는 모습을 담은 동상이다.
콜럼버스는 서쪽 바다를 통해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을 수 있다고 믿고 포르투갈의 주앙 2세 왕에게 지원을 요청하지만 거절을 당한다.
그러자 스페인으로 넘어가 이사벨 여왕에게 지원을 요청하지만 이사벨 여왕은 그라나다를 정복하느라 바쁘니 다음에 이야기하자며 콜롬버스를 돌려보낸다.
이사벨 여왕에게도 거절당한 콜롬버스는 다시 포르투갈로 넘어가 요청을 해보지만 이번에도 거절당한다.
결국 6년을 기다려 그나나다를 함락한 이사벨 여왕을 다시 찾아간 콜럼버스는 계약을 맺는데 성공해 2척의 선박을 지원받는다.
계약의 내용은 콜럼버스를 해군 제독으로 임명하며 항해로 얻은 수익의 10%를 받는 것이었는데 계약을 맺은 콜럼버스는 1492년 8월 3일, 항해를 시작한다.
화창한 하늘 아래,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걸어가는 이런 모습이야 말로 내가 생각하던 진짜 유럽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슈퍼를 찾기 위해 길을 걸어가는데 대부분의 상점들이 문을 닫고 씨에스타를 즐기고 있었다.
날이 너무 더운 낮 시간에는 가게의 문을 닫고 낮잠을 자는 씨에스타가 거의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그라나다에는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아 신기했다.
다행히 먹고는 살아야하니 슈퍼마켓은 문을 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만났던 Dia 슈퍼마켓을 본고장 스페인에서 보니 반가웠다.
가장 싼 크림소스를 사용했더니 생긴 것처럼 맛도 별로였다.
맥주와 함께 먹으니 먹을만 했지만 다음부터는 조금 비싼 소스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맛이었다.
아침부터 열심히 돌아다녔으니 체력회복을 위해 낮잠을 자다 다시 밖으로 나왔다.
오전과는 다르게 오후의 구름은 붓으로 칠한 것처럼 신기하게 생겼다.
골목길을 보면 깔끔하게 정돈이 되어 있으면서 발코니마다 똑같은 화분을 배치해 아기자기하게 꾸몄는데 정말 귀여웠다.
그라나다의 일몰을 보기 위해 알바이신 지역으로 올라간다.
해의 위치를 보니 역광이라 생각만큼 아름답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도 계속해서 골목길을 따라 올라간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니 알람브라 궁전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내일 갈테니 하루만 더 기다려주렴.
가장 유명한 전망대라 그런지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다들 누군가와 함께 올라온 것 같았다.
혼자 여행한지 하루 이틀 지난 것도 아니기에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데 가끔씩은 외롭기도 하다.
외롭지 말아요 외롭지 말아요
나의 친구여
아프지 말아요 아프지 말아요
나의 친구여
도화지속 세상을 다 가질 수 없다 하여도
너에겐 내가 있잖아
세상사람 모두가 너의 맘을 몰라준다 해도
너에겐 내가 있잖아
가슴 아픈 일들이 눈살 찌푸리게 한다 해도
너에겐 내가 있잖아
떠나버린 사랑이 너를 힘들게 한다 하여도
너에겐 내가 있잖아
외롭지 말아요 외롭지 말아요
나의 친구여
아프지 말아요 아프지 말아요
나의 친구여
넘버원 코리안 - 외롭지 말아요.
난간에 걸터앉아 음악을 들으며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데 바닥을 보니 조금 무섭다.
역시 나와 고소공포증은 떼려야 뗄 수 없나 보다.
교회에 들어가 기도도 해본다.
세계평화가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여름이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지 밤 9시가 넘었는데도 해가 질 생각을 않는다.
계속 기다리려다 내일을 기약하며 오늘은 그만 내려가기로 했다.
골목길에 각종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많이 있었는데 아직도 가야할 길이 많이 남은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내가 일몰을 포기하고 그냥 내려온 이유를 고백하자면 술이 고팠기 때문이다.
스페인에는 따파스라 불리는 간단한 맥주 안주들이 유명한데 그라나다의 펍에서는 맥주를 시키면 따파스를 공짜로 준다.
맥주 가격도 2유로(한화 2,800원)정도 밖에 하지 않으니 저녁 대신 술을 먹어도 될 것 같았다.
처음에 간 곳에서 배를 채웠으니 자리를 옮겨 다른 펍으로 왔다.
펍마다 따파스의 종류가 다르니 여러 곳을 돌아가며 먹어 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닭고기였는데 맥주와 가볍게 먹기에 딱 좋았다.
밥 대신 술만 먹어도 기분이 좋은데 공짜 안주까지 주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게다가 한번만 주는 것이 아니라 맥주 한 잔을 추가할 때마다 새로운 따파스를 고를 수 있으니 여기가 천국이다.
내일의 천국을 기대하며 오늘은 세 잔만 마시기로 했다.
기분 좋게 숙소로 돌아와 씻고 나오다 욕실에서 미끄러졌다.
그라나다가 천국이라며 좋아했는데 진짜 천국으로 갈 뻔 했다.
너무 아파 뼈에 금이간 줄 알았는데 다행히 혹만 났다.
세계여행 중에 욕실에서 넘어져 죽을 수는 없으니 조심, 또 조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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