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니 마차푸차르와 안나푸르나 2봉으로 추정되는 설산이 우리를 반겨준다.
지금은 설산 앞을 다른 산이 가로막고 있지만 내일은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있을거라 생각하니 설렌다.
여왕마마께서 네팔에 오시기전에 후기를 읽었는데 촘롱에서 와이파이가 된다는 글도 읽었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혹시나하고 와이파이를 잡아봤는데 진짜로 잡힌다.
해발 2050m에서 와이파이가 터지다니 역시 인간은 대단하다.
광고를 보니 약 3700미터인 MBC(마차푸차르 베이스 캠프)에서도 와이파이가 터진다는데 뭐라 할 말이 없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출발하려고 달밧을 시켰는데 달밧이 없다고 한다.
네팔식당에서 달밧이 안되는 것은 한국에서 기사식당에 갔는데 백반이 없다는 것과 똑같은 것인데 어이가 없었다.
결국 메뉴를 보며 탄수화물을 찾다가 삶은감자를 시켰다. 물론 최대한 많이 달라는 말은 빠지지 않는다.
양은 꽤 많았지만 밥대신 감자를 먹으니 속이 허하다.
포터들은 짜파티만 2장씩 먹는 모습을 봤는데 촘롱에서 유명한 피자를 먹고 싶다고 우리가 정한 숙소로 와서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은 것 같아 미안했다.
론리플래닛에 피자가 맛있다고 소개된 우리가 묵었던 숙소.
아마 촘롱에서 먹은 피자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혹시나 트레킹을 시작했는데 산 속에서 와이파이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촘롱코티지로 가면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다.
1시간정도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우리가 묵었던 촘롱마을이 보인다.
역시 산은 뒤를 돌아보는 맛에 오른다.
뒤돌아보는 맛에 오른다고는 하지만 계속되는 오르막길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계단이 있어서 오르막길을 오르기 쉬운 것은 맞지만 끝없이 펼쳐진 계단은 계단을 발명한 사람을 원망하게 만든다.
게다가 오늘 우리가 올라가야하는 고도는 정해져있기에 내리막길이 나오라고 빌 수도 없다.
마마님들은 아침에 핫케이크 한조각씩을 드셨고 난 감자한판을 먹었고 포터들은 짜파티 2장을 먹었기에 우리 모두 배가 고팠다.
중간에 감자 한판을 먹은 사람이 껴있기는 하지만 감자는 탄수화물 덩어리일뿐 밥이 아니다.
그래서 평소보다 이른 점심을 먹기로 하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빅사이즈를 강조하며 볶음밥을 주문했다.
어차피 뱃속에 계란 한알정도 들어가봐야 단백질이 간에 기별도 안갈테니 그냥 야채볶음밥을 시켰는데 이상한 볶음밥이 나왔다.
야채볶음밥인데 계란만 있길래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그냥 맛있게 먹었다.
다 먹은 뒤 계산을 하러 가니 다른 볶음밥이라며 돈을 더달라기에 우리가 주문한 종이를 보여주고 제대로 계산했다.
아 당이 땡겨서 안되겠다.
난 고급스러우니까 초콜릿 한조각도 썰어먹는다.
ABC에 오르면서 신라면을 비롯해 엄청난 양의 비상식량을 챙겨가는 팀들을 많이 봤는데 우리 팀은 내가 실패해봤기에 최대한 경량화에 신경을 썼다.
그 결과 야식으로 먹을 봉지라면 2개씩과 초콜릿 1개, 사탕 1봉지만 챙겼다.
산사태가 일어난 곳인데 저 밑에 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해보니 아찔했다.
사람들이 나무를 없애고 계단식 밭을 만들어 작물을 키우다보니 지반이 약해져 산사태가 쉽게 일어난다고 한다.
우리 모두 자연 파괴하지 맙시다.
근데 산을 깎아만든 밭에서 난 감자를 아침으로 먹은 내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역시 말로는 무슨 말이든지 할 수 있지만 그걸 실천하기는 참 힘이 든다.
결국 나도 역시 평범한 위선자인가 보다.
이 사람은 그냥 평범한 아저씨가 아니다.
바로 엄홍길 대장이다.
우리가 아는 그 유명한 엄홍길 대장이다.
열심히 올라가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학생들 어디까지 올라가냐고 묻길래 ABC까지 간다고 했다.
그러니 아저씨께서 학생들인데 기특하다며 힘을 내라고 하셨다.
그런데 아저씨 얼굴을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다시 보니 엄홍길 대장이었다.
우리끼리 혹시 엄홍길대장이 아니냐며 속삭였는데 쑥쓰러우셨는지 수고하라고 하시며 바로 내려가 버리셨다.
빨리 알아차렸으면 같이 사진도 찍을 수 있었을텐데 아무도 히말라야에서 엄홍길대장을 만날거라고 생각을 못했기에 기회를 놓쳤다.
그래도 기록을 남겨야 된다는 일념으로 바로 카메라를 꺼내 엄홍길대장의 뒷모습이라도 찍을 수 있었다.
역시 남자는 얼굴도 잘생기고 뒷모습도 멋있어야한다. 참 남자로 살기 힘들다.
근데 엄홍길 대장님. TV에서 보던 모습과는 다르게 살이 좀 찌셨더군요.
엄홍길대장을 만났다고 신기해하다보니 별로 힘이 드는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산을 탔다.
그런데 엄홍길대장은 ABC(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서도 4000m를 더 올라갔다 와보셨을텐데 우리들은 그 베이스캠프까지 간다고 낑낑대며 올라가고 있었으니 얼마나 귀여우셨을까.
웃으며 걷다 보니 앞에 강적이 나타났다.
우리가 애써 올라온 높이를 다 깎아먹는 내리막계단이 나타나버렸다.
고도가 낮아진다는 생각과 내려간만큼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암담해졌다.
거기다 하산할 때는 이 길이 오르막길로 다가올거라는 생각이 들자 무서워졌다.
점점 설산이 다가온다.
우리가 열심히 가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주렴.
이왕이면 자석이라도 달린듯이 우리를 좀 당겨주면 안되겠니.
자세히 보면 눈이 녹아서 물이 흐르고 있다.
저 물은 엄청 깨끗할 것 같은데 너무 멀어서 마실 수가 없다.
세상에는 볼 수만 있고 가질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아름다운 구름이나, 찬란한 태양이나, 길을 걸어가는 아름다운 여자들이나.
멀리서 나를 바라만 봐주세요
바라보기만 하고 만지지는 말아주세요
만지기만 하고 사랑하진 말아주세요
사랑하기만 하고 바라보진 말아주세요
그대 가슴은 차가운 냉장고
그대 눈동자엔 눈물 한방울 고이지 않는 냉동인간
그대는 에어컨 추워추워추워추워
멀리서 너를 바라봐주기만 하겠어
바라보기만 하고 만지기도 해주겠어
만지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해주겠어
사랑하기도 하고 바라봐주기도 하겠어
그대 주위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
그대 심장에는 피한방울 흐르지 않는 냉혈인간
그대는 냉장고
그대는 에어컨
그대는 이쑤시개
그대는 짜장면
그대는 유리창
고도가 높아졌는지 바로 옆에 있는 산에 눈이 쌓여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세상에는 가질 수 없는 것들이 많다지만 안나푸르나의 눈은 만지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올라간다.
오늘은 히말라야라 불리는 지역에서 잠을 자기로 했다.
우리가 전날 묵은 촘롱보다 높은 고도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은 없고 트레커들을 위한 숙소인 롯지만 운영되고 있다.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야채커리를 시켰는데 밥을 수북이 줘서 행복했다.
역시 사람은 등이 따숩고 배가 불러야 행복하다.
마마님, 히말라야부터는 고소예방을 위해 씻으면 아니되옵니다.
자전거여행을 할 때 안 씻고 다니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혼자라면 처음부터 안 씻었겠지만 마마님들이 워낙 깨끗하셔서 나도 청결함을 유지했었다.
그런데 오늘부터는 고소예방이라는 확실한 이유가 있기에 물티슈로만 씻는데 밤에 씻지 않고 침낭으로 들어가니 정말 행복했다.
사람은 게을러야 행복해지나보다.
여러분은 지금 상거지를 보고 계십니다.
포터인 기아누에게 미안해 짐을 줄이고자 라면을 먹기로 하고 마마님에게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했는데 플래쉬가 터져 엄청 굶주린 모습으로 나왔다.
남자들은 군대에서 봉지에 뜨거운 물을 부어먹는 일명 '뽀글이'를 많이 먹는다고 하지만 난 해군을 나와서 '뽀글이'와는 인연이 별로 없었다.
해군은 배에서 야식으로 먹으라고 컵라면을 많이 보급해주기에 '뽀글이'를 해먹을 일이 별로 없다.
'뽀글이'경험이 일천하다 보니 물조절에 실패해 조금 싱거웠지만 참 맛있었다.
여러분 군대 가실거면 고급스러운 해군으로 가세요. 엄청 편합니다. 아 군대 또 가고 싶다.
난 해외장기체류라서 예비군도 면제받는데 가서 총 쏘고 싶다. 정말로.
장난이고 국군장병 여러분 감사합니다. 힘내세요.
<오늘의 생각>
엄홍길대장을 만났다. 대장이라는 칭호가 정말 멋있는 것 같다.
나도 특별한 칭호를 하나 가지고 싶다.
오늘은 대망의 ABC까지 올라가는 날이기에 고소예방을 위해 갈릭스프를 시켰다.
네팔에 와서 갈릭스프라는 것을 처음 먹어봤는데 정말 맛있어서 한국에 돌아가면 엄마한테 해 달라고 할거다.
마마님들도 만족하셨는데 진짜 신기한 맛이다.
거기에 마마님의 은총인 볶음김치와 내가 여행을 떠나며 샀던 고추장을 5달만에 먹었다.
맛은 정말 꿀맛 그 자체였다.
역시 마마님을 모시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오늘은 ABC까지 올라갈 예정이라 힘차게 걸음을 내딛는데 간밤에 눈이 왔었나 보다.
앞날은 생각도 안하고 눈이 내리니 이제야 히말라야에 온 것이 실감난다며 즐겁게 걷는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새하얀 ABC를 상상하며 걸어간다.
그런데 출발한지 30분정도 지나자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한다.운치가 있다며 감탄을 하면서 올라간다. 순식간에 맑았던 하늘이 사라지고 히말라야라는 이름에 걸맞는 눈보라를 헤치고 나간다. 눈이 계속해서 내리자 처음에 신나던 기분은 사라지고 조금씩 걱정되기 시작한다. 혹시나 살이 쪘다고 오해하실 수도 있는데 이건 살이 찐게 아니라 패딩을 껴입어서 그런겁니다.
정말이에요. 믿어주세요.
거대한 자연앞에서는 어떤 수식어도 붙일 수가 없다.
그저 장관이라는 말밖에 안나온다.
산신령님. 저희에게 길을 열어주시옵소서.눈사태가 일어난 구간인데 저 많은 눈이 날 덥친다고 상상해보니 아찔하다.
기아누는 한국인 등산객들과 산을 자주 타서 몇가지 한국어를 할 줄 알았다.
특히 눈사태와 산사태가 일어난 곳을 보면 한국어로 눈사태~ 산사태~라고 했다.
우리도 한국어를 알려주고 싶어서 고고씽이 출발하자는 의미라고 알려주고 출발할 때는 항상 고고씽이라고 말했다 .
오늘도 당이 땡기니까 핫초코 한잔 먹고 힘을 내야겠다.
어제 아침에 마마님들께서 핫케이크를 시켜먹을 때 나온 꿀을 내가 당이 땡긴다며 수저로 퍼먹었더니 마마님들이 신기하게 쳐다봤었다.
그러나 잠시 후 계속 퍼먹는 나를 따라서 한입 드셔 보시더니 당의 맛을 알아버리셨고 우리는 곰돌이 푸가 왜 꿀을 먹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눈이 계속해서 내리는데 도저히 그칠 기미가 안보여 다시 출발했다. 설산을 찍었는데 마마님이 요기있네?내가 원하고 상상하던 그 설산을 걷는다.
전에도 말했듯이 배낭여행을 시작하며 가장 기대한 곳 중 하나가 네팔의 히말라야였는데 실제로 걸으니 정말 신났다.
하지만 즐거운 내 기분과는 달리 내가 산 싸구려 짝퉁 노스페이스 신발은 역시나 물이 새기 시작했고 내 발가락은 얼어갔다.
난 수족냉증이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더 춥게 느껴지고 발가락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ABC에 올라가기 바로 전인 MBC(마차푸차르 베이스 캠프)에 도착했다.
네팔에 오기 전까지는 MBC가 미들 베이스 캠프인줄 알았었다.
언 발을 녹이며 빅사이즈의 볶음밥을 먹었다.
내 입맛은 변함이 없는데 마마님들은 입맛을 잃으셨다.
마마님들이 내려주신 은총으로 한그릇을 더먹었다.
진형씨는 살짝 머리가 어지럽다고 해 비아그라를 한알 먹었다.
오늘 아침에 출발하기전에 혹시나 해서 다같이 다이아목스를 반알씩 먹고 출발했는데 별 효과가 없었나보다.
눈은 계속해서 오고 계속해서 쌓인다.
진형씨가 걱정됐지만 우선은 출발하고 아프면 바로 내려가기로 했는데 조금 올라가다 안될 것 같아 MBC로 복귀했다.
혹시나 해서 조금 더 내려가자고 했지만 괜찮다고 해 그냥 MBC에서 쉬기로 했다.
진형씨가 자기때문에 ABC를 못 올라 간 것 같다며 계속 미안해하는데 아픈 사람에게 걱정하게 만든게 더 미안했다.
팀원중에 한명이 아프니 분위기가 다운되길래 분위기 전환을 위해 제설작업을 시작했다.
제설~제설~제설~ 노래를 부르며 제설을 하니 군대 기분이 났다.
아 이번편에서는 왜 이렇게 군대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여자들은 군대이야기 싫어한다니까 그만 이야기해야겠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자면 군대는 다시 가고 싶을 정도로 좋은 곳이니까 미필자분들은 걱정마세요.
제설작업의 핵심은 눈을 아무리 쓸어도 끝이 없다는 것이다.눈이 많으니 눈사람도 크게 만들 수 있을거라 기대했는데 잘 뭉쳐지는 눈이 아니라 원래 계획보다는 작은 눈사람을 만들었다.
어릴 때나 만들고 놀았던 눈사람을 25살 먹고 만드니 신났다.
우리 모두 동심으로 돌아가봅시다.
학교를 다니고 학원을 다니고
대학을 나오고 직장엘 다녀도
아무것도 모르겠네 정말 모르겠네
한다고 하는데도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동물원 가본지 얼마나 됐는지
꽃구경 가본지 얼마나 됐는지
멀티플렉스 극장 구경 가보고 싶네
동네서도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데
한심해
텅빈 애들 놀이터에 앉아 있었지
언제 내가 어른이 돼버린 걸까아~ 아~ 아~
차라리 내가 사라져버리면 어떨까
지금~~~
사라져라 사라져라 사라져라 사라져
사랑에 빠져도 느낌이 안오고
이별을 하고도 눈물이 안나네
말린 꽃처럼 부서질 것 같은 내 마음
바람 부는대로 날려가는 휴지조각 같은데
텅빈 애들 놀이터에 앉아 있었지
언제 내가 어른이 돼버린 걸까아~ 아~ 아~
차라리 내가 사라져버리면 어떨까
지금~~~
저녁을 먹으러 나왔는데 설산이 빛나고 있었다.
분명히 한밤중인데 설산이 하얗게 보인다.
때마침 이 날이 정월대보름날이었는데 달빛에 반사된 설산의 모습은 예술이었다.
마마님들이 밥이 나왔다며 먹고 찍으라고 했지만 설산이 자꾸 날 붙잡아 계속 사진을 찍었다.
그래도 밥을 거를수는 없다.
아직 먹기위해 사는지 살기위해 먹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쨋든 먹어야 사는 것은 분명하다.
밥을 먹고 나와도 아름다운 설산은 도망가지 않는다.
이런 모습을 보여준 달님이 정말 고맙다.
아마 이 모습을 보기 위해 우리가 MBC에서 잠을 자게됐나보다.
<오늘의 생각>
역시 히말라야는 마음을 쉽게 내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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