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day 02)

원래는 아침 8시 30분이 출발예정시각이었지만 짐을 장착하고 휘발유통을 고정한 스텐밴드를 자르고 하다보니 9시가 넘어서 집에서 나왔다.
집앞 중랑천 자전거길에서 간단히 체인오일 한번 치고 9시 30분쯤 제대로 출발했다.

다른 자전거여행자들을 보면 자전거에 이름도 지어주고 하는데 난 도저히 이름이 안떠올라 그냥 '자장구'라 지었다.
따사로운 햇살아래 자장구 사진을 한장 찍었는데 가방들이 너무 깨끗하고 예쁘게 찍혔다. 

모든 짐을 싣고는 처음 달리는 거라 걱정했는데 핸들이 엄청 무거울뿐 그럭저럭 달릴만했다.
팔당가는길에 보스몹인 고갯길이 나왔지만 끌바로 극복했다. 침흘리며 끌었기에 부끄러워 사진은 안찍었다. 

평소 자전거를 타면 최소 팔당까지는 탔기에 친숙한 팔당대교도 지나고

팔당댐도 지나가는데 도로가 좋으니 속도가 쭉쭉나온다.
출발할 때만 다르지 평지에서는 속도가 평소와 똑같이 나오고 탄력이 붙으니 더 재미있다. 

시원한 자전거 터널도 지나는데 태양아래를 달리다 들어가는 터널은 천국이다.

점심은 집에서 싸온 주먹밥으로 해결했는데....

밥값이 공짜라고 대가를 치뤘다. (빨간거 김치국물 흘린거 아님. 빨간약임.)
자전거를 세우기 위해 내리는데 무거운 자전거가 처음이라 내리다가 자빠져 상처가 났다. 

안다치면 좋겠지만 사람일이 뜻대로 되는게 아니기에 직접 채운 응급키트로 소독을 하고 약을 발랐다.

북한강철교도 지났지만 몇번을 와본 길이기에 아직까지 별로 설레이지는 않았다.
오빈역까지는 자전거도로를 타고 가기로 했는데 라이딩오신 동호회분들이 앞에 공사중이라고 알려주셔서 같이 국도를 '역주행'하는데 무서웠다.
무서웠으니 당연히 사진은 없다. 

여기가 바로 사탄이 있는 사탄천. 착하게 삽시다.

드디어 오빈역이 나오고 6번 국도를 따라 강원도로 간다. 

첫 터널을 지나는데 앞으로도 지킬 자전거 여행에서의 원칙을 하나 세웠다.
꼭 정차한 뒤 후미등을 켜고 터널 사진찍기.

터널을 다 빠져 나와서 '터널 별거없네'라고 생각하는 순간 도로 옆에 있는 턱에 프론트페니어 가방이 쓸리며 마찰로 구멍이 났다.
순간 머릿속으로 별에별 욕이 다 떠오르고 용문터널에 저주를 퍼붓고 패니어 가격이 떠오르고 내 방수시스템에 구멍이 났다는 사실에 좌절하며 내가 무슨 좋은 꼴을 보자고 여행을 시작했나. 등등 온갖 마이너스 에너지가 쏟아져 나왔다. 
도저히 사진을 찍을 정신이 아니여서 결국 집에 돌아온 뒤 사진을 찍었다. 

계속되는 오르막길에 첫날부터 패니어는 빵구났지, 물도 다 떨어져가니 세계일주를 하겠다고 이미 말을 뱉어 놓은 내가 바보같다는 생각도 들어 머리도 식힐겸 휴게소에 들어 갔다.
하지만 휴게소에 들어가자마자 생존본능이 솟아나며 비싼 건 못사겠고 게토레이 캔 1개를 사고 물 좀 떠도 되냐고 물었더니 좀 떨떠름한 표정으로 승낙해주셔서 얼른 물을 뜨고 나와 화장실에서 세수한번 하고 어차피 언젠간 고장날 가방이었다며 달리기 시작한다.

오르막이 계속해서 나오고 강원도로 가고있다는 것이 실감나기 시작한다.

아무리 가도가도 계속 양평이어서 달릴 맛이 안났는데 드디어 양평과 인사를 했다.
서울과 강원도 사이가 다 양평이니 길긴 길다.

반갑다. 강원도~

해발 300m정도야 뭐 간단하게 올라간다.
는 개 풀 뜯어먹는 소리고 계속되는 오르막으로 내려서 끌고 올라가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냥 계속 업힐이다.

횡성으로 가는 길에 잠잘 곳이 없어 걱정하다가 하나로마트 옆에 정자가 있길래 사장님께 허락을 구하고 텐트를 치고 잤다.
텐트를 치기전에 너무 배가 고파 빵을 하나 사서 먹고 집에서 싸온 주먹밥을 다 해치우고 씻기도 귀찮아 그냥 잠이 들었다.

<오늘의 생각>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은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조선 전기의 문인서예가. 

楊士彦(양사언), 1517~1584

양사언 싸우자.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는 무슨 산은 무시하면 안되는 것이다. 

텐트치고 잔 첫날 밤이라 중간에 몇번을 깼지만 침낭이 좋아 춥지는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에서 쌀을 씻어 놓고 세수와 머리도 감고 밥을 한다.
처음 해보는 코펠 밥인데 내가 생각해도 정말 예술이었는데 양이 조금 많았지만 점심을 생각해 볶음김치와 같이 억지로 다 먹었다.

왼쪽에 보이는 정자가 어젯밤의 내 집이었다.

횡성터널도 지나고.

고작(?) 45kg정도 밖에 안되는 내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기도 힘든데 저 굴삭기를 싣고가는 트럭의 위대함을 느끼며 끌바를 했다.

계속 오르막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면 '내가 이만큼이나 올라왔구나'하는 생각도 들지만 자주 뒤돌아보면 의지가 약해진다. 

그래 어디까지 올라가나 한 번 가보자.

다른 자전거여행자들이 오르막차로 끝이라는 표지판이 나오면 엄청 반가워 하던게 떠오른다.
이제 나도 내리막길만 남았다고 행복해 했는데...

훼이크였다. 오르막차로는 끝났지만 오르막은 끝나지 않았다.
이래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는 것인가...
뒤통수를 제대로 맞아서 체력도 급고갈되고 근성으로 끌고 올라간다. 

나에게 굴욕과 좌절을 안겨준 황재. 절대 잊지 않겠다. 

알았어. 오빠가 달릴 수 있게 제발 적당한 경사의 길만 나와주렴.

점심은 둔내로 가서 먹기로 했는데 둔내가 둔내 안나와서 둔내 힘들었지만 달리다보니 둔내가 나왔다.
산들을 넘으며 점심은 무조건 국밥을 먹을거라 생각했기에 사진속의 황태해장국집에 들어갔다.
배가 너무 고팠기에 밑반찬까지 싹 다 긁어먹고 공기밥 반 그릇을 더 먹고 물도 채우고 삶은 달걀도 주길래 나중에 먹으려고 챙겨 나왔다.

나는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속도에 나를 맡기는게 무서워 24살 먹도록 스키장에 한번도 안갔었는데 이번기회에 지나간다. 

배도 채웠으니 오르막길따윈 가뿐하게 올라간다.

하지만 얼마 못가 다시 끌바를 시작한다.

횡성을 지나 평창군에 들어서자 끝없는 내리막이라 앞으로 올라갈 것을 걱정하며 내려가는데 바퀴에 토마토 씨같은 노란게 묻어서 '난 토마토를 밟은 적이 없는데?' 생각하며 달리다가 이상해서 멈춰섰다.

알고보니까 아까 챙겨둔 달걀이 삶은게 아니라 날달걀이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분명히 속이 차 있었던거 같았는데 황태해장국에 넣어 먹으라고 준 계란을 고이 품고 오다가 진동에 의해 깨진 것이었다.
옆에 농수로에서 계속 물을 퍼다 닦고 물티슈로 닦았지만 향긋한 비린내가 계속나 그냥 달렸다.

해발 500m면 동네 뒷산보다는 높은 높이인데 어느새 올라왔다.

장평으로 향하다 아저씨들과 잠시 대화를 하고 재산재를 오르고 나니 장평에 도착했다.
자여사에서 둔내를 거쳐서 장평으로 가는 코스를 추천해줘서 따라왔더니 20km정도 돌아 왔지만 길은 괜찮았다고 자기위안을 한다. 

장평 슈퍼에서 내일 아침으로 먹을 가격대 칼로리가 가장 높은 꿀호떡과 쿨피스를 사고 옆 하천 둑방길에 텐트를 치고 라면을 끓여먹는데 어두워 아무것도 안보이는 상황에서 텐트치고 홀로 끓여먹는 라면이 이렇게 맛있는지 처음 알았다.
내일은 대관령을 넘어서 한 100km 정도 가야하니 5시 30분에 알람을 맞추고 잠에 든다.

<오늘의 생각>
티끌모아 태산.
작은 언덕이 모여 사람의 의지와 근성을 시험하는 태산이 된다.
업힐 좀 그만 나와라. 내가 자전거를 타는지. 자전거가 나를 타는지 모르겠다. 
 

  1. 대단하시네요~~~

  2. 요즘 자전거에 푹 빠져서 자전거 여행을 꿈꾸며 여행기들을 찾아 보고 있는데 이번
    님의 여행기를 보면서도 꼭 하고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