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최대한 늦게 출발하는 야간열차를 탔지만 새벽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호스텔에 찾아가니 다행히 빈 침대가 있어 바로 체크인을 하고 잠을 잤다.
예전에는 야간이동을 해도 별로 피곤하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피곤함이 쉽게 찾아온다.
눈을 뜨고 보니 벌써 해가 지려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첫 날을 이대로 보낼 수 없으니 카메라를 챙겨 거리로 나간다.
똑같은 러시아인데 상트페테르부르크와는 다르게겨울의 향기가 물씬 난다.
러시아하면 떠오르는 테트리스 성당인 성 바실리 성당도 보인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비슷한 모양인 피의 성당을 봐서 그런지 큰 감흥이 없다.
상트페레트부르크에서 피의 성당을 처음 봤을 때는 그 아름다움에 정말 설렜었는데 원조인 성 바실리 성당에게 미안해진다.
여행을 많이 할수록 새로운 풍경에 대한 역치가 높아지는 것 같긴하다.
겨울이 오면 서울 시청 앞에 아이스링크를 설치하듯이 크렘린 궁 앞에 아이스링크를 설치하고 있었다.
아이스링크가 개장했었으면 쇼트트랙의 나라에서 온 여행자의 위엄을 보여줬을텐데 아쉽다.
이 문을 지나가면 그 유명한 붉은 광장이 나온다.
붉은 광장은 원래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불렸는데 러시아의 혁명 기념일에 사람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모여 광장을 붉은 색으로 물들인 뒤로 붉은 광장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호스텔에 모스크바 지도가 없길래 여행자센터에 가서 관광지도를 받았다.
구글 맵을 이용하면 편하다고들 하지만 아직은 한 눈에 들어오는 지도를 보며 하는 여행이 더 좋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모스크바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굼 백화점을 가보기로 했다.
밖에서 본 백화점 건물도 대단했지만 내부로 들어가니 정말 화려했다.
여기 저기 구경을 하다보니 다리가 아파 이만 돌아가기로 했다.
저녁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다 러시아의 패스트푸드점인 째레목이라는 가게에 들어가봤다.
뭐가 뭔지 모르니 그림을 보고 주문해야해 러시아식 물만두인 펠메니를 시켰는데 사워크림을 얹어 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조합이었는데 먹어보니 꽤 맛있었다.
러시아에 왔으면 당연히 도시락을 먹어줘야한다.
중앙아시아에서 먹던 그 맛이 떠오른다.
오늘 아침은 어제 사온 씨리얼이다.
같은 탄수화물이지만 밥을 먹으면 하루가 든든한데 씨리얼은 배 부르게 먹어도 금방 배가 꺼진다.
러시아의 지하철 역이나 지하통로에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데 사람 사는 느낌이 들어 재미있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도 지하 상점들을 좋아하던 것이 아마 구 소련의 영향인 것 같다.
지하철을 타고 열심히 달려 입장 티켓을 샀다.
다들 노어를 읽으실 줄 아실거라 믿고 무슨 티켓인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지하철역 근처에 장이 열렸는데 다양한 해산물이 많이 보였다.
왠지 매운탕 거리를 사고 싶었지만 고춧가루도 없고 직접 만들어 먹기 귀찮아 그냥 눈으로만 구경했다.
모스크바 시내에는 러시아 국립도서관이 있다.
국립도서관 앞에는 러시아의 대문호인 도스토옙스키의 동상이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의 작품을 남겼는데 이런 도스토옙스키의 동상이 맞아주는 러시아 국립도서관에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 여러 책들의 초판본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오늘은 크렘린 궁 안에 들어가보기로 했다.
궁 안에 들어가려면 입장권을 끊어야하는데 이번에도 역시 국제학생증 덕에 할인을 받았다.
속된 말로 러시아를 국제 깡패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국제학생증을 비롯해 예술, 문화 방면에서 학생이나 어린이들을 대우하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크렘린 궁은 지금도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기에 입장권이 있다고 해도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한다고 한다.
내가 산 표는 무기고인 아머리 챔버의 입장권인데 딱 무기고 근처만 갈 수 있고 주변은 군인들이 길을 통제하고 있었다.
입장권만 사면 크렘린 궁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쉬웠다.
무기고는 사진 촬영도 금지라 기록으로 남은 것은 없지만 다양한 전시물들이 재미있어 입장료가 아깝지는 않았다.
특히 오래된 성경책들이 정말 멋있었다.
구 소련의 상징인 꺼지지 않는 불꽃은 모스크바의 붉은광장에도 있었다.
나라를 위해 싸운 군인들을 잊지 않고 기리는 모습은 봐도봐도 부럽다.
징병제인 탓도 있고 과거 군부독재의 영향도 있겠지만 언젠가는 우리나라도 군인들을 '군바리'라고 놀리기 보다는 고맙고 존경스러운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생겼으면 좋겠다.
이 건물은 붉은광장의 한 편을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 국립 역사 박물관인데 난 박물관보다 미술관이 좋으니 밖에서만 구경하기로 했다.
여기가 그 유명한 레닌의 묘인데 베트남에서 본 호치민의 묘가 떠오른다.
베트남이 소련에서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면서 함께 묘를 쓰는 법도 같이 배워왔나보다.
오늘 저녁은 쌀밥이 당겨 마트에서 파는 볶음밥과 닭고기를 샀다.
역시 한국인은 쌀밥을 먹어야한다.
저녁을 먹고 붉은광장을 가로질러 가려고 보니 문을 닫아놔 한참을 빙 돌아갔다.
내가 저녁에 붉은 광장을 가로지르려 했던 이유는 바로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다.
모스크바에서 일하고 계신 형님들과 여행 중인 한국 사람끼리 만나 술 한잔을 하기로 했다.
간단히 맥주를 마시다 보드카를 사들고 형님네로 자리를 옮겨 술을 마셨는데 보드카가 왜 보드카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마셨다.
아침에 밖으로 나오니 웅장한 건물이 나를 반겨준다.
역시 러시아의 기상은 대단하다.
아마 맥도날드라고 써 있는 것 같은데 가까이 다가가면 햄버거가 먹고 싶어질까봐 멀리서 사진만 찍었다.
모스크바의 번화가인 아르바트 거리인데 주말이라 문을 연 가게가 별로 없었다.
번화가는 북적거려야 제 맛인데 아쉽다.
이것이 러시아다.
조형물을 공용 재떨이로 사용하는 것인지, 재떨이를 조형물로 만들어 놓은 것인지 모르겠다.
붉은 광장을 지나가는데 웨딩 촬영 중인 커플이 보여 구경하며 행복하기를 빌어줬다.
날씨가 너무 좋아 자꾸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붉은 광장의 입구에는 사람들이 동전을 던지는 장소가 있는데 중앙에 서서 등 뒤로 동전을 던졌을 때 원 밖으로 안 넘어가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관광객들이 동전을 던지자마자 거지들이 동전을 주워가고 있었는데 여기서 하루만 동전을 주워도 모스크바 여행할 돈을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소원이 이뤄진다는 소문은 모스크바 거지 연합에서 퍼뜨린 것 같다.
이 성당은 카잔 대성당인데 1612년 폴란드의 침공을 막은 것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지었다고 한다.
배가 고파 작은 노점에서 간단한 핫도그 빵을 하나 샀더니 전자렌지에 데워준다.
오늘의 저녁 메뉴는 북한 음식이다.
북한과 교류 중인 나라들에는 외화벌이를 위한 북한 음식점이 있는데 모스크바에도 평양 음식점이 있다고 해 찾아와봤다.
존경하는 국정원 직원분들, 전 그저 북한 식당이 궁금했을 뿐 북한과는 아무 상관 없는 착한 시민입니다.
뭘 먹을까 고민하다 평양 온반이라는 음식을 시켜봤는데 닭고기 국 맛이 났다.
간은 전체적으로 삼삼했지만 깔끔한 맛이라 좋았다.
온반 하나로는 배가 차지 않으니 냉면도 한 그릇 시켰는데 이 것도 맛있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니 스피아민트 껌을 준다.
북한 음식과 사람이 궁금해 찾아가봤는데 우리와 별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이 한국어를 이용해 주문을 받고 있었다.
어서 빨리 통일이 되어 평양 맛집을 찾아가보고 싶다.
러시아의 지하철에는 공용 와이파이도 설치되어 있었다.
드디어 내가 산 입장권을 쓸 때가 되었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유명한 문화생활은 볼쇼이 발레단이지만 발레가 별로 당기지 않아 볼쇼이 서커스를 보기로 했다.
볼쇼이는 러시아어로 '크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서커스 공연은 하나의 큰 스토리를 가지고 있고 다양한 묘기들이 펼쳐지는데 정말 재미있고 신났다.
부모님 손을 잡고 온 아이들이 많이 보였는데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공연이었다.
호랑이도 나오는 줄 알았는데 곰만 나와 조금 아쉬웠지만 공중곡예는 정말 대단했다.
재미있게 공연을 보고 시내로 돌아와 쇼핑몰을 잠시 둘러보다 숙소로 향한다.
그냥 돌아가기 아쉬우니 성 바실리 성당의 야경을 한번 더 봐주고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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