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코프에서 잡은 호스텔은 아침을 제공해주지 않길래 오트밀을 찾아 마트를 헤맸는데 무슬리만 팔고 있었다.
초콜릿과 단 음식을 좋아하는 나이지만 자꾸 오트밀을 먹다보니 무슬리도 달게 느껴져 많이 먹어지지가 않는다.
날이 많이 더워 트램을 탈지 1초 정도 고민했는데 그냥 그늘을 따라 걸어가기로 했다.
많이 걸은 만큼 맥주를 마시니 살이 빠질 틈이 없다.
버스를 타기 전 까르푸에 가서 간단한 먹거리를 샀다.
요즘 날이 더워 에너지가 부족한 것 같아 자양강장제를 샀는데 별 효과는 없었다.
한 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미니버스를 타고 가야하는데 에어컨은 없고 통풍은 천장에 있는 단 하나의 창문으로 이뤄지고 있어 한증막에 온 것 같았다.
나는 다행히 앉기라도 했는데 이 더위에 서서 미니버스를 타고 간다면 정말 힘들 것 같았다.
찜통같은 버스 사이로 들어오는 한줄기 바람의 소중함을 느끼다보니 기사아저씨께서 '오시비엥침'이라고 외치셨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우슈비츠'는 독일어 발음이고 폴란드에서는 '오시비엥침'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찾아오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
가장 간편한 방법은 크라코프 시내에 있는 여행사를 통해 투어를 신청하는 것인데 투어를 이용하면 에어컨이 나오는 밴과 영어로 설명해주는 가이드가 있으니 날이 더울 때는 추천할만 할 것 같다.
두번째는 나처럼 혼자 찾아 오는 것인데 크라코프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 된다.
게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는 한국어 안내책자도 5즈워티(한화 2,000원) 정도에 팔고 있으니 영어를 못해도 상관이 없다.
안내서는 한국외대 폴란드어과의 박상준 씨가 번역해주셨다고 써있는데 나도 내가 가진 재능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우슈비츠 입구에는 'Arbeit Macht Frei'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 문구는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강제노동에 끌려나간 수감자들은 12시간 이상 일을 했는데 수용소를 출입하는 수감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오케스트라가 행진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수감자들에게 제공되는 식량은 썩은 야채와 물로 끓인 멀건 스프와 약간의 빵이 전부였는데 약 1,300칼로리 정도로 하루를 버텨야 했다고 한다.
나중에 수용소가 개방되었을 때, 발견된 여성 수감자의 몸무게는 23~35kg 정도였다고 한다.
입구 근처에는 다른 수감자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 탈옥를 시도했던 수감자의 시체를 세워뒀던 곳도 있었다.
수용소 외부에는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희생된 수감자들을 화장한 재를 보니 처참한 대학살이 일어났던 곳에 온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나치 강제수용소와 학살단인 SS특별임무대를 창설한 하인리히 힘러는 아우슈비츠보다 동쪽에 위치한 학살지에서는 대규모 행동이 불가능하며 교통 입지조건도 유리하고 주위로부터 격리, 차단하기가 용이하기에 아우슈비츠를 선택했다고 한다.
슬로바키아,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 각지에서 잡힌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로 끌려왔고 12,000명의 소련군 포로도 있었는데 그 중 8,320명이 5개월도 안 되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또한 21,000여 명의 집시들도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죽었는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포로들 중에는 도착한지 5분도 되지않아 가스실로 끌려가 사형을 당한 사람들도 많았는데 학살을 은폐하기 위해 사망자명부에는 그들의 사인을 거짓으로 기재했다고 한다.
통조림 캔처럼 보이는 통들은 '사이클론 B'라 불리는 독가스 통이다.
아우슈비츠에서만 1942년 부터 1943년까지 20,000kg의 사이클론 B가 사용되었는데 사람 1,500명을 죽이는데 필요한 사이클론 B의 양은 6~7kg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SS대원들은 수감자들을 가스실로 데려가기 위해 샤워를 하기위해 샤워실로 가는 것이라는 거짓말을 했었다고 한다.
수감자들이 간 곳은 천장에 샤워기가 달린 방이었는데 물 대신 독가스가 나왔고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15~20분 사이에 질식사 했다고 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죽으면 금이빨을 뽑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귀금속을 챙기고 머리카락을 자른 후 화장터로 보냈다고 한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 것을 다시 살게 된다.'
수감자들의 안경을 모아 놓았는데 고철을 재활용하려고 모아 놓은 것처럼 보였다.
실제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관에 들어가니 소름이 돋고 숨이 막혔다.
쌓여있는 수만 켤레의 신발들을 보니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옆에 있는 전시관에는 매트리스와 천을 만들기 위해 모아놓은 죄수들의 머리카락과 아이들이 쓰던 우유병 등이 있었는데 너무 잔인하고 안타까워 사진을 찍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과 희생된 사람들이 부디 영면에 들었기를 바라는 생각만 들었다.
수감자들은 제대로 된 침구류도 없이 좁은 방에 짚을 깔고 잠을 잤다고 한다.
또한 잠을 자기 전에는 점호를 했었는데 점호를 하는데 19시간이나 걸린 날도 있었다고 한다.
수용소 관리국장은 수감자들에게 '너희들이 나갈 수 있는 곳은 화장터의 연기밖에 없다.'라며 그들을 학대하고 학살했다고 한다.
수감자들의 방 옆에는 SS요원에 의해 뽑힌 관리장이 살던 방이 있었다.
자신의 안락함을 위해 협조한 이들을 보니 친일파가 떠오른다.
물론 그들이 자신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삼았다는 부분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간수장이나 일제치하의 대한민국에서 친일파 행동을 했을 때, 그들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지속적인 탄압을 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지, 내 가족을 위해서는 어떤 선택을 했을지는 그 상황에 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민족과 동료와 친구들을 배신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에 후대의 사람들이 그들을 욕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명심해야할텐데 일제강점시기를 미화하려는 시도들이 자꾸만 보이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곳은 총살이 이뤄지던 죽음의 벽이다.
한시간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형판결을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이 먹먹해지고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 명복을 빌어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지하에는 특별감옥이 있는데 이곳은 질식방과 아사방이라고 한다.
한꺼번에 많은 수감자들을 넣어 질식시키거나 음식과 물을 주지 않고 아사할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이 철조망을 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을까.
도대체 그들이 무슨 권리를 가졌었길래 다른 사람을 이렇게 학살할 수 있었던 것일까.
난 그 시대를 살던 사람이 아니니 그냥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웃으며 살아도 되는 것일까.
1947년 4월 16일, 나치친위대 중령이자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의 사형이 이 교수대에서 집행됐다고 한다.
이 건물은 화장터와 가스실이다.
원래는 사체안치실이었던 곳을 가스실로 개조해 사용했다고 한다.
한 가운데 놓여 있는 꽃이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사용하던 가마가 남아있는데 하루 350여 구의 사체가 화장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한 곳이라고 하기에는 풍경이 너무 평화롭다.
부디 신이 있어 희생된 사람들을 보듬어줬기를 바라며 수용소에서 나왔다.
씁쓸하고 꿀꿀한 기분은 놓고 생각할 거리는 가진 채 크라코프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탄다.
폴란드에도 다양한 맥주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마트에 가니 새로운 맥주가 많이 보여 하나를 골랐다.
마트에 진열된 아무 맥주나 골라도 1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유럽이 부럽다.
음악을 들으며 여러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가족이 생각나 넥스트의 아버지와 나를 틀었다.
아주 오래전, 내가 올려다본 그의 어깨는 까마득한 산처럼 높았다.
그는 젊고, 정열이 있었고,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나에게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내 키가 그보다 커진 것을 발견한 어느날,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그가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이 험한 세상에서 내가 살아 나갈 길은
강자가 되는 것 뿐이라고 그는 얘기했다.
난, 창공을 나르는 새처럼 살거라고 생각했다.
내 두발로 대지를 박차고 날아 올라 내 날개 밑으로
스치는 바람 사이로 세상을 보리라 맹세했다.
내 남자로서의 생의 시작은
내 턱 밑의 수염이 나면서가 아니라 내 야망이.
내 자유가 꿈틀거림을 느끼면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기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나의 아버지, 혹은 당신의 아버지인가?
가족에게 소외받고, 돈벌어 오는 자의 비애와,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
집안 어느 곳에서도 지금 그가 앉아 쉴 자리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버린 자식들 앞에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남은 방법이란 침묵뿐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아직 수줍다.
그들은 다정하게 뺨을 부비며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를 흉보던 그 모든 일들을 이제 내가 하고 있다.
스폰지에 잉크가 스며들 듯 그의 모습을 닮아가는 나를 보며.
이미 내가 어른들의 나이가 되었음을 느낀다.
그러나 처음 둥지를 떠나는 어린 새처럼
나는 아직도 모든 것이 두렵다.
언젠가 내가 가장이 된다는 것.
내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무섭다.
이제야 그 의미를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그 두려움을 말해선 안된다는 것이 가장 무섭다.
이제 당신이 자유롭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나 였음을 알 것 같다.
이제,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후에,
당신이 간 뒤에,
내 아들을 바라보게 될 쯤에야 이루어질까.
오늘밤 나는 몇 년만에 골목을 따라 당신을 마중 나갈 것이다.
할 말은 길어진 그림자 뒤로 묻어둔 채
우리 두 사람은 세월속으로 같이 걸어갈 것이다
넥스트 - 아버지와 나 Part 1.
해가 지기 시작하니 이제야 살만해진다.
여름이 싫어 첫 여름은 남반구인 호주로 도망쳤는데 이제는 어디로 도망쳐야할지 모르겠다.
거리에서 행위예술을 하고 계신 아저씨가 계셨는데 특색 있으시길래 돈을 드리고 사진을 찍었다.
007 흉내를 내며 전화를 받고 달려가는 마임을 하시는데 정말 멋있었다.
분수대가 없으니 소방호스로 분수를 만들어놨다.
한 가운데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내 가방에는 카메라와 핸드폰, 여권, 현금 등 너무 많은 것이 들어있어 눈으로 즐길 수 밖에 없었다.
세상이 발전해갈수록 우리는 자연을 즐기기보다 피하게 되는 것 같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시원함을 즐기고 싶은데 신경써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크라코프 광장 근처에는 크라코프 성이 있는데 체력이 바닥나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볼 필요는 없다는 자기 합리화를 하며 밑에서만 바라봤다.
배가 많이 고프지 않길래 그냥 굶으려다 호스텔 근처에서 케밥을 하나 사 먹었다.
유럽을 여행하며 케밥을 자주 먹고 있는데 케밥의 고장인 터키에 가서는 뭘 먹어야할지 모르겠다.
크라코프 구시가지에는 유대인들이 생활하던 곳이 있다길래 지친 몸을 이끌고 구경을 갔는데 내부 출입은 금지되어 있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분위기가 좋길래 지나가며 메뉴판을 봤는데 가격이 조금 비쌌다.
외국은 식당의 외부에 메뉴판을 비치해놓고 있어 살펴보는 것에 대한 부담이 없어 참 좋다.
폴란드의 편의점 업체 중에는 원숭이를 마스코트로 쓰는 곳도 있고 개구리를 마스코트로 쓰는 곳도 있다고 한다.
하루에 아이스크림 한 개씩은 먹어줘야한다.
날씨는 덥지만 맛있는 아이스크림이 저렴하니 행복하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크라코프의 야경을 구경한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달이 귀엽게 보인다.
날이 더우면 낮에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쉬고 밤에 돌아다니면 된다.
호스텔로 돌아와 창밖을 봤는데 어둠이 깔리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내가 느낀 그 감정을 그대로 표현할 수도 없고 사진으로 남길 수도 없어 아쉽기도 하지만 그런 상황을 겪을 때마다 내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오늘은 크라코프를 떠나야하니 남겨두었던 무슬리와 우유를 다 넣고 많이 많이 먹는다.
내 지친 심신을 달래준 아이스크림이 있는 크라코프를 그냥 떠나기 아쉬우니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먹어줘야한다.
이번에 가는 곳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다.
어렸을 때,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샤바 샤바 바르샤바'로 불렀던 것 같은데 원곡은 '샤바 샤바 아이샤바'라고 한다.
어쨋거나 나는 크라코프에서 5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바르샤바로 간다.
버스에서 내렸는데 배가 너무 고프길래 그림을 보고 음식을 하나 주문했다.
케밥을 먹으려다 폴란드 음식을 먹자고 시켰는데 빵 위에 버섯과 치즈가 토핑된 것이 전부였다.
고기가 없어 실망했지만 난 치즈도 좋아하고 버섯도 좋아하니 맛있게 먹었다.
바르샤바는 폴란드의 수도답게 지하철이 있었다.
그 나라 언어를 모르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렵지만 지하철은 노선도만 잘 보면 되니 버스보다는 이용하기 쉽다.
호스텔을 찾아가는데 노란버스와 골조만 올라간 건물과 크레인이 귀엽게 보여 사진을 찍었다.
건물 짓는 것이 귀엽게 보이다니 이상하긴 한데 지금 다시봐도 귀엽다.
바르샤바도 더우니 해가 지기를 기다리다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왔어도 오늘은 딱히 어디를 가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아 그냥 밥이나 먹기로 했다.
호스텔 근처에 마음에 괜찮은 식당이 없길래 이번에도 케밥을 먹는다.
맥주가 당겨 피보(Piwo)가 없냐고 물어보니 맥주는 없다길래 옆 슈퍼에 가서 맥주를 사온다고 케밥을 만들어 달라했더니 아저씨가 막 웃으신다.
외국에서 온 애가 폴란드어는 알지도 못하면서 맥주를 뜻하는 피보만 외치고 있으니 웃기셨나보다.
맥주를 마시며 아저씨와 대화를 하다 다음에 또 오기로 약속을 하고 호스텔로 돌아갔다.
숙소에 돌아와 여행기를 쓰려하는데 넷북의 충전선이 단선됐다.
단선된 부분을 찾아 억지로 구부려 쓰고 있는데 넷북이 그만 아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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