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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Travel/서울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 - 001. 경복궁

세계일주 배낭 여행기 연재가 끝이 나기 전부터 새로운 주제를 어떻게 정해야할지 고민하다 우선은 내가 관심이 있던 역사와 전공인 건축, 그리고 나와 뗄 수 없는 여행에 대해 써보기로 하고 우선은 서울 근처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로 정했다.

가장 첫 이야기는 우리에게 친숙하며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경복궁을 주제로 정하기로 했다.

경복궁의 정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광화문인데 광화문의 뜻은 임금의 교화가 빛처럼 만방에 미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광화문에는 3칸의 문이 있는데 이는 왕의 나라이기에 3개이고 황제의 나라였던 중국의 자금성은 5칸의 문을 가지고 있으며 가운데의 문은 임금만 지나갈 수 있는 문으로 왕세자라 하더라도 왕이 되기 전에는 가운데의 문으로 지나가지 못했었다고 한다.

현재의 광화문은 1990년 시작된 경복궁 1차 복원정비 사업을 마치며 2010년 재건된 것으로 지금은 누구나 지나갈 수 있는 광화문 가운데 칸의 천장을 보면 음양오행에서 남쪽을 상징하는 주작이 그려져 있다. 

광화문을 통해 궁궐 안으로 들어오면 매표소가 있는데 만 24세 이하의 청소년은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는 수문장 교대식이 진행되니 시간대를 맞춰가면 광화문 앞에서 진행되는 수문장 교대식도 볼 수 있다.

입장권을 검사하는 곳은 광화문 다음에 있는 예를 부흥한다는 뜻을 가진 흥례문으로 이 곳부터 경복궁 이야기가 시작된다.

앞으로 이야기 할 주제를 정한 뒤, 이야기의 깊이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했는데 학술적인 이야기보다는 소소한 이야기 위주로 글을 쓰는 것이 내 글을 접한 많은 분들이 우리 주변의 문화유산에 흥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아 적당한 선을 찾아가기로 했다.

처음에는 경복궁의 궁궐도와 여러 건물들의 도면을 함께 보며 이야기를 풀어나가 볼 생각도 했었는데 자세한 기준은 앞으로 몇 개의 이야기를 더 진행해봐야 알 것 같다.

흥례문을 지나면 바로 앞에는 다리가 보이는데 이는 금천교라 불리는 영제교이다.

금천교에는 풍수지리 사상이 들어있어 나쁜 기운이 궁궐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풍수지리에서 바람은 기운을 흩어지게 만들고 물은 기운을 멈추게 만드는 것을 기본적인 원리로 하고 있다고 한다.

금천교에는 해치처럼 보이는 동물이 있는데 이는 해치가 아니라 천록이라 불리는 상상속의 동물인데 물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금천교를 지나면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으로 향하는 근정문이 보인다.

앞에서 말했듯이 조선은 왕의 국가이기에 3칸의 문만 만들 수 있었는데 근정문에는 총 5개의 입구가 보인다.
자세히 보면 3칸의 문은 근정문에 달린 문이지만 나머지 양 옆의 문은 벽에 달린 문임을 알 수 있는데 평소에는 근정문을 닫아 놓았기에 그 때 사용하던 출입구가 벽에 달린 양 옆의 일화문과 월화문을 사용했다고 한다.

근정문 역시 가운데 칸은 왕만이 지나갈 수 있는 문이었는데 왕세자의 즉위식도 이 근정문 앞에서 이뤄졌었다고 한다.
근정전은 왕의 건물이기에 아무리 왕세자라고 하더라도 근정전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 근정문 앞에서 왕의 즉위식을 열고 난 후 근정전으로 향했다고 한다.

근정문을 지나가기 전 왕이 다니던 가운데 칸의 정중앙에 서면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볼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건축을 추구해왔기에 근정전의 처마와 북악산이 함께 어우러진 모습을 만들어 냈다.
처음 이 풍경을 알게 된 뒤로 경복궁에 갈때면 항상 이 위치에 서보는데 GPS나 정밀한 측량기계 없이 이러한 건축을 한 조상님들이 정말 대단하다.

근정전은 왕이 정사를 보는 곳으로 부지런하게 정치를 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근정전 주변에는 행각이 있는데 이 곳에는 슬픈 역사가 있다.

행각의 기둥을 보면 기둥 사이를 연결한 흔적이 남아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약탈한 유물들의 박람회를 이 행각에서 하며 이 곳에 있던 건물들을 헐었다고 한다.

근정전으로 향하는 길에는 역시 어도가 있는데 어도는 다른 길과 구분되어 있으면서 높이도 약간 높게 설치되어 있다.

박석이라 불리는 바닥의 돌들은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주기 위해 일부러 투박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녀 그나마 편평해졌지만 복원되었던 초기에는 돌들의 높이가 꽤 높고 생김새도 어울리지 않았었다고 한다.  

어도의 양 옆에는 24개의 품계석이 있어 조회할 때 위치를 나타내주는데 근정전과 가까울수록 높은 품계를 가진 신하들이었다.
특히 우리가 사극에서 자주 들었던 당상관은 고위 관리직으로 대청에 올라 왕과 함께 정사를 논할 수 있다고 해 당상관으로 불렸고 그 아래로 당화관, 참화관이 있었다. 

흔히들 인터넷에서 과거의 조선은 복지국가였다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이 고리이다.
이 고리는 비가 오거나 날이 더울 때 천막을 치기 위해 사용하던 고리라고 한다.
또한 겨울이 되어 날이 추우면 신하들을 위해 근정전에서 열리던 조회도 평소보다 줄였었다고 한다.

근정전으로 올라가는 길의 중앙에는 봉황이 새겨진 답도가 있는데 상징적인 의미 때문인지 이곳은 출입금지 표시를 해 놓았다.

아쉬운대로 신하들이 걷던 계단을 통해 올라오면 근정문부터 흥례문, 광화문을 통해 궁궐 밖이 보인다.
왕세자가 즉위식을 마치고 왕이 되어 처음 근정전에 올라 이 풍경을 보면 그제서야 자신이 왕이 됐음을 실감했을 것 같다.

근정전은 두 개의 단 위에 위치해 있는데 이는 상월대와 하월대로 불린다.
이 또한 중국과 비교했을 때 한 단이 낮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중국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기에 앞에서부터 중국보다 격이 낮게 표현된 부분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에 황제의 권위를 침범할 수 없었던 우리나라의 모습이니 너무 안타깝거나 불편하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신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을 하나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궁궐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은 맞지만 경복궁이 자금성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다.
경복궁은 1394년에 착공하여 10개월 뒤인 1395년에 완공되었으며 자금성은 1406년 착공하여 1420년에 완공되어 경복궁이 자금성보다 25년 빨리 지어진 건물이다.
또한 자금성에 비해 엄청 작다고 알려진 경복궁은 자금성의 60% 크기인 13만 평의 면적을 가지고 있으니 경복궁을 너무 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  

근정전의 상월대와 하월대에는 12지신과 사방신의 조각이 배치되어 있는데 사방신은 각자 수호하는 방향에 맞춰 북현무, 동청룡, 서백호, 남주작의 위치에 배치되어 있고 12지신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의 순서에 맞춰 배치되어 있는데 소의 위치만 축시 방향이 아닌 4시 방향에 배치되어 있다.
또한 술과 해에 해당하는 개와 돼지의 조각만 존재하지 않는데 이에 대해 남겨진 기록이 없어 정확한 답을 알 수는 없지만 개와 돼지는 천한 동물이며 주인이 바뀌어도 잘 따르는 동물이기에 임금이 계신 곳에 배치할 수 없어 제외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근정전 내부에는 왕을 상징하는 물건이 3개 있는데 천장에 달린 닫집, 왕이 앉던 용상, 그 뒤에 있는 일월오봉병이 있다.

용상은 당연히 왕을 위한 자리이며 닫집이라 불리는 것은 불교 문화에서 넘어온 것으로 부처님과 같은 귀한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월오봉병은 음양으로 이루어진 우주와 유교에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할 기본적인 다섯가지 도리인 인의예지신을 의미하며 왕을 상징하는 병풍인데 이러한 병풍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쓰지 않았고 오직 조선에서만 썼다고 한다.

그렇기에 왕이 외출을 할 때도 휴대용 일월오봉병을 가지고 다녔으며 왕의 얼굴인 용안은 함부로 그릴 수 없기에 임금의 행차같은 모습을 그린 그림에는 왕 대신 일월오봉병을 그렸다고 한다.
일월오봉도는 우리가 가진 만 원짜리에도 세종대왕님의 배경으로 그려져 있는 그림이다.

또한 근정전 중앙의 천장에는 왕을 상징하는 황룡이 존재한다.

이 황룡의 발톱 개수를 세보면 7개로 황제를 의미하는 칠조룡이다.
이는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7조룡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전까지 조선은 왕의 지위를 가진 나라였기에 왕이 입고 있던 곤룡포에는 5개의 발톱을 가진 용이 수놓아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근정전 옆에 있는 이 솥은 왕권을 상징하는 정이다.
과거 중국 하나라의 왕이었던 우왕이 자신의 왕권을 상징하기 위해 자신이 통치하던 9개의 주에서 바친 청동으로 솥을 만들고 구정이라 불렀던 것에서 왕권을 상징하는 솥이 생겨났다고 한다.

다른 쪽에는 순우리말인 드므라 불리는 큰 솥같은 그릇이 있는데 이 것은 화마를 막기 위한 장치이다.
과거 사람들은 화마가 불씨를 가져와 불을 낸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화마의 생김새가 엄청 무섭게 생겨 불을 내러 왔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도망가라는 의미에서 드므를 설치해 놓았다고 한다.

근정전의 왼편에는 과거 자격루가 설치되었던 터를 표시하는 표지석이 있는데 경복궁 내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에 가면 복원된 자격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보루각 터 옆에는 수정전이라 불리는 건물이 있는데 이는 세종대왕 때 집현전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고종 황제가 다시 복원한 건물이다.

집현전이 수정전으로 바뀐 이유는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을 때 집현전 학자들이 이에 대해 반발했었는데 왕이 된 세조가 왕권에 도전한 자들에게 죄를 물어 집현전을 없애버렸기에 현재는 수정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근정전의 서쪽에는 경복궁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 중 하나인 경회루가 위치하고 있다.

경회루라는 이름은 하륜이라는 신하가 지은 것으로 “대개 어진 임금의 정사는 사람을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니, 사람을 얻은 뒤에라야 ‘경회’ 라 이를 수 있을 것이다."라며 경회루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경회루는 다른 건물들과 다르게 돌 기둥 위에 지어진 2층 누각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 전에는 기둥에 용이 조각되어 있어 물에 비친 용의 모습이 정말 멋있었다고 하는데 고종 황제 때 복원하며 그냥 민무늬 기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경회루의 지붕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하자면 우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한옥에서 기와 밑의 공간을 빈 채로 두는 것이 아니라 적심이라 부르는 나무들과 엄청난 양의 흙을 넣어 건물의 기둥을 지붕이 누르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는데 구조적인 위험성이 있어 현재 경회루의 지붕에는 흙을 빼고 보강재로 보강해 놓은 상태이다.

그리고 지붕 위로 하얀 시멘트 처럼 보이는 것은 마루라 불리는 것으로 기와를 여러장 겹치고 회칠을 해 만든 한옥의 전통 기법이며 특히 중앙부에 위치한 것을 용마루라고 부른다.

마지막으로 추녀마루 위에 올려진 조각들은 중국에서 전해진 잡상이라 부르는 것으로 사악한 기운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잡상은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의 모습을 하고 있고 건물의 규모에 따라 최대 11개까지 올리는데 경회루에는 11개의 잡상이 올려져있다.  

또한 연산군이 경회루에서 흥청이라 불리던 기생들과 놀던 것에서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경회루의 연못을 파며 나온 흙은 교태전의 뒷동산인 아미산을 만드는데 쓰였다.

현재 일반 관람으로는 경회루에 입장할 수 없는데 1주일 전부터 열리는 사전 예약을 통하면 경회루에 직접 올라가 볼 수도 있다고 한다. 

다음에 간 곳은 임금님의 침전인 강녕전으로 임금님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앞에서 경회루의 지붕을 이야기하며 용마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바로 이 강녕전 때문이다.
용은 임금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동물로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에는 임금이 있기 때문에 용마루를 만들지 않고 추녀마루만 만들었다. 

강녕전의 대청은 9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방을 왕이 사용하고 주변 칸에는 지밀상궁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어 왕의 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강녕전은 월대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왕의 침전이기에 당연히 온돌과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왕이 머무는 궁궐에서는 연기가 많이 나는 나무대신 숯을 이용해 난방을 했다고 한다. 

강녕전의 뒷 편으로 가면 굴뚝이 보이는데 지하를 통해 연결된 온돌이 굴뚝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굴뚝을 자세히 살펴보면 만수무강이라 써진 글을 볼 수 있는데 모든 부분들에서 왕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굴뚝 위에는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에 집처럼 조형물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를 연가라고 부른다.
연가는 조형적인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빗물이 들지 않도록 하고 아궁이 방향으로 바람이 불어 연기가 역류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강녕전 뒤에는 중전마마의 침전인 교태전이 있다.

교태전은 사귈 교(交)자와 태평할 태(泰)자를 써 왕과 왕비 두 분이 사귀셔서 태평한 세상을 펼칠 훌륭한 세자를 생산하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건물인데 일부 몰지각한 중국의 가이드들은 왕비가 교태를 부리는 곳이라는 뜻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교태전 역시 용마루를 얹지 않았지만 임금님이 계신 강녕전과 격차를 두기 위해 월대를 세우지 않고 건물의 규모도 조금 작게 만들었다. 

교태전의 뒷 편에는 경회루를 건설하며 생긴 흙으로 만든 동산인 아미산이 있다.

이 아미산에는 4개의 굴뚝이 있는데 각 굴뚝의 가장 밑에서부터 사악한 것을 쫓아내는 불가사리, 사군자와 십장생, 길함과 복을 상징하는 학과 박쥐를 새긴 무늬판을 박아놓았고 가장 위에는 덩굴무늬가 새겨진 무늬판을 박아놓았다.
아름다운 굴뚝들은 현재 보물 811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교태전을 나오면 우리가 대장금에서 보던 수라간이 보이는데 궁궐음식 만들기와 같은 각종 체험행사도 진행한다고 한다.

현재 경복궁은 2차 복원 계획에 따라 복원 중인데 2차 복원이 끝나는 2030년에는 고종 황제시절 재건했던 경복궁의 75% 수준까지 복원이 완료되며 가장 큰 틀은 민속박물관과 주차장 철거, 금천교 물길 복원이 있다.

경복궁을 구경하다 보면 동쪽에 보이는 기괴한 건물은 2차 복원에서 사라질 민속박물관이다.

민속박물관이 위치한 곳은 원래 왕세자가 머물던 동궁이 있던 자리로 처음 민속박물관이 들어설 때부터 건축학계에서는 반대 의견이 나왔던 건물로 전통양식을 본따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궁궐 안에 시멘트로 만들어진 높은 전각은 이질감을 주며 과거 일제강점기 때 박물관, 전시회장으로 사용되던 경복궁의 아픔을 떠올리게 하는 건물이기에 2030년 전에 이전 될 계획이라고 한다. 

계속해서 북쪽으로 올라가다보면 연못과 정자가 나오는데 정자의 이름은 향원정으로 향기가 멀수록 맑다는 뜻인 향원익청에서 따왔다고 한다.

향원정의 연못은 땅을 상징하기에 네모나게 만들고 정자가 위치한 섬은 하늘을 상징해 동그랗게 만들었는데 이를 동양사상에서는 천원지방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또한 향원정의 서쪽에는 물이 돌아 들어오는 열상진원이라는 곳이 있다.
이는 풍수지리에서 명당수로 불리는 서류동입의 원리에 따라 일부러 서쪽에서 물이 흘러와 동쪽으로 흘러가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향원정의 뒤로 가면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아픈 역사를 가진 건청궁이 나온다.

맑은 하늘이라는 뜻을 가진 건천궁 안으로 들어가면 옥으로 만든 병 속에 있는 얼음조각과 같은 깨끗한 마음을 가지라는 뜻을 가진 옥호루가 나온다.

명성황후는 이 옥호루에서 살해당하고 뒷 산에서 불에 태워졌는데 일본의 악행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퍼졌고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게 된 일본은 형식적으로 을미사변을 일으킨 48명을 감옥에 구치하였으나 이들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풀려났고 결국 을미사변을 책임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현재 남겨진 문화유산도 중요하지만 다시는 이런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아무리 과거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하더라도 소화시설은 필요하기에 경복궁 내부에는 곳곳에 소화전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소화전 위에 시트지를 붙여놓은 모습이 참 귀여웠다. 

건천궁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향하면 경복궁의 북동쪽에 위치한 집옥재가 나온다.

집옥재의 모습은 우리의 전통 방식으로 지어진 건물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띄고 있는데 이는 중국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 지어진 건물이기에 그렇다.
가장 큰 특징은 유리로 된 창을 가지고 있고 벽돌을 이용한 점, 지붕의 처마선의 모습이 다른 것을 꼽을 수 있다.

집옥재는 옥처럼 귀중한 것을 모아 놓은 건물이라는 뜻인데 옥 대신 왕실의 도서를 모아놓은 서재로 책을 중히 여기는 왕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원래 집옥재는 궁궐의 다른 건물들처럼 내부가 개방되는 건물이 아닌데 올해에는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처럼 꾸며서 개방을 해놓았다. 

내부로 들어갈 때는 앞에 비치된 실내화를 신고 들어가야하며 서탁이 있어 조용히 책을 읽을 수도 있다.

내부 개방을 한 덕분에 지금까지 항상 밖에서만 보던 집옥재의 천장을 실내에서 볼 수 있어 좋았다.

청나라 풍의 건물을 지었기에 창의 모양도 우리가 중국영화에서 보던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실내에 전시되고 있는 작품 중 하나는 박세당의 장원급제 답안지였는데 한문을 잘 모르니 내용을 알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집옥재 건물의 왼쪽에 위치한 팔각형 건물인 팔우정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곳으로 책을 습기로부터 보존하기 위해 땅에서 떨어진 누각형태로 지었는데 이번에 개방하며 카페로 이용하고 있었다.

물론 일반 관람객에게 개방한다는 취지는 좋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궁궐 안의 건물에서 커피를 팔아야 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집옥재를 마지막으로 경복궁 관람을 마치고 나서 경복궁의 북서쪽에 있는 신무문을 통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신무문을 통해 과거 조선의 왕이 묵던 경복궁 밖으로 나오면 현재의 대통령이 지내는 청와대가 나오는데 과거와 현재의 궁을 보며 경복궁 답사를 마친다.


세계일주 여행기를 쓸 때는 제가 겪은 이야기 위주로 


글을 썼기에 조금은 쉬운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었는데


새로운 주제로 글을 쓰려니 글이 잘 써지지 않네요.


계속해서 생각하고 노력하겠습니다.


부족한 제 글이지만 재미있으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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